부
산
기
부산행
부산에 아무런 연고도 없다. 여행 아니면 올 일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부산에 있다. 이건 물론 여행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2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공기업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럼 이제 면접 준비를 해야지? 2주 반의 시간과 막막한 마음이 내 등을 떠밀었다. 부산에 괜찮은 면접학원이 있대! 그래? 솔직히 부산은 너무 멀지 않나 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망망대해에 빠진 이들은 살짝 보이는 튜브에 희망을 품는 법이다. 내 눈에는 그것이 분명 튜브로 보였다. 그럼 가보지 뭐. 속은 척 기차표를 예매했다. 무궁화로 약 5시간 반을 달려 부산역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을 지나쳐 도착한 숙소는 번화가의 그다지 번화하지 않은 구석에 있었다. 비수기라서 그런지 숙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꽤 넓은 3인실을 혼자 쓰는 기분이란 나쁘지 않았다.
첫 수업은 낯설었다. 면접이라는 망망대해에 발을 내딛는 첫순간이란.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고, 나는 튜브를 잡은 사람이 아니라 바닷속 물방울 하나로 섞여든듯 우울해졌다. 할 수 있을까. 하면 할 수 있겠지만 괜한 센치함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날 밤은 속이 너무 안좋아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걱정때문일까? 이런 적이 없는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지만 도통 모르겠더라. 정확한 원인은 다음날 아침에 알 수 있었다.
기차 타러 가기 전에 먹은 굴이 상해있었다. 부모님도 똑같은 이유로 고생하셨다고 하더라. 이런 씨발... 여름도 아닌 초봄에 노로바이러스라니. 제발 굴 양식장에 똥싸지마세요 씨발롬들아.
대답하는 나날
면접이란 대화를 통해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골라내는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면접 질문은 어느정도 틀 안에서 나온다. 이미 많은 데이터가 있고, 예상할만한 질문과 예상할만한 답이 오간다는 뜻이다. 과연 학원은 지금껏 쌓아놓은 데이터와 경험에서 우러나온 각종 질문 대처법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었다. 정말이지 대동강 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언변이었다. 슬슬 시간이 흐르며 얼추 어떤 질문이건 대답은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하나 더 뛰어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진정성이 있어야 한단다! JJS(진정성)! 예로부터 우리 집 민가 나부랭이들은 '영혼이 없다' '진정성이 없다'같은 각종 음해에 시달려왔다. 물론 혹자는 이것이 음해가 아닌 진실이라고 말하지만 진실은 저편에....
아니 이게 아니지. 어찌되었건 없는 진정성이라도 끌어내야만한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답은 연기뿐이다. 대답하기 전에 나는 배우고 연기를 엄청나게 잘한다는 자기암시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사람들 생각은 대동소이하고, 내용의 특출남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쉽사리 잊혀지기 마련이다. 진실함(의 연기)과 진지함(의 연기)이 남는 것이다. 일단 최대한 진정성 있는 사람을 가장하고 있으나 이것이 얼마나 진정성 있어보일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연기를 잘했으면 면접이 아니라 오디션을 보러갔겠지.
인터넷친구는 부산에 있어요
사실 정확히 말하면 부산 아니고 근교 다른 도시에 사신다. 어쨌건 겸사겸사 그분도 부산에 오실 일이 있어서 그분을 숙소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꼭 부산에 갈게요!라고 공수표 날린 게 엊그제같은데 정말로 부산에서 만났다. 인도요리집에서 식사한 후 자주 간다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엔 정말 한명도 없었다. 널찍한 카페를 전세낸 기분으로 창가 근처 자리에 앉았다. 부산에서 만나는 그분은 새삼 더 반가웠고, 그날따라 더 학원 가기가 싫었다. 사실 맨날 가기 싫었지만.
시스터와 할머니
연고가 없다고 말은 했지만 부산에 엄밀히 말하면 가족이 있긴 있다. 이모할머니가 부산에 살고계신다. 사실 일주일 안쪽이면 좀 신세져볼까 생각도 했지만 2주가까이 되는 기간과 내가 염치를 아는 인간인 탓에 그냥 숙소를 잡았다. 그래도 기왕 왔으니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마침 집에 있던 동생(휴학생)이 겸사겸사 부산에 놀러와서 할머니 댁에 머무른다고 하기에 더더욱 한번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주말엔 시간이 비어있었다.
토요일 낮 처음 찾아간 할머니 집은 그야말로 산중턱에 있었다. 역에서 한참 걸어올라가서야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반기는 이는 물론 할머니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는 마리아 초상화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할머니의 집 곳곳에는 종교의 흔적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종교의 흔적 아래로 바닥 가득히 짐이 쌓여 있는 것은 덤이다. 동생 말로는 사실 그 집엔 2층이 있어서 집안에 늘어놓지 못한 짐들은 전부 2층으로 올라가있단다. 어쩐지 무서워졌다. 이모할머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언니고, 할머니와 외모는 물론 걱정 많은 성격까지 닮아계셨다. 토요일은 일단 동생과 둘이 태종대에 다녀오기로 했다. 2014년 이후로 5년만에 찾은 태종대는 여전히 울창하고 멀리 바다가 보였다. 이번에는 다누비열차도 탔지롱! 그리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냥 타고있는 것 만으로 충분히 재미있었다. 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등대 전망대 안에도 들렀다. '등대여권'이라는 작은 수첩과 스탬프가 놓여있었다. 앞으로 어떤 등대에 더 갈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아이디어만큼은 정말 좋았다. 디자인도 예쁘고. 다만 등대여권 스탬프랠리 보상을 받으려면 포항을 가야 한다는 것이 큰 문제다... 포항에 갈 일은 부산보다도 더 없을 것이다. 등대를 나와 태종대를 한바퀴 돌았다. 절 앞에서 며칠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며칠 전 동생이 만난 남자 이야기에 시간이 순식간에 녹았다. 사실 말린다롤이 새로 오픈한 카페에 가고싶었는데 영 피곤한 눈치였던지라 그냥 집에 가서 쉬기로 했다. 숙소 앞 돈까스집에서 돈까스를 후루룩 넘기고 멍하니 방안에 앉았다. 피곤했는지 꽤 금방 잠이 들었다.
일요일도 이모할머니네 집에 갔다. 할머니가 자주 가는 아구찜집에서 아구찜을 사주신단다. 아구찜 집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맛집인 모양이었고 할머니는 연신 대접 위의 아구찜을 내 밥그릇 위로 옮겨놓으시는데... 정말 정말 정말 양이 많았다. 도저히 더는 못먹겠다 싶을 정도로 배가 불렀을 때 계산을 하려고 했더니! 아니 이게 뭐야! 할머니가 먼저 슬쩍 계산을 하셨더라.... 깜짝 놀랐다. 남은 아구찜은 포장해서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한잠 자고 일어나서 아까 먹다 남은 아구찜을 먹었다. 그냥 아까 다 먹었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뭐 먹었으니 됐다.
천천히 시간이 오고있다.
주말이 지나고 처음으로 나가는 학원. 정말 가기 싫다... 가기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정직하게 학원으로 가고있다. 슬픈 일이야. 매일매일 똑같은 자기소개를 외우고 나올 법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방법을 읊는다. 시간이 가는듯 안가는듯 어지럽게 흘러간다. 점심으로 피자뷔페를 갔다가, 돈까스를 먹었다가, 이 컵라면을 먹어봤다, 저 컵라면을 먹어봤다가, 하여간 이것저것 먹었다. 낙지볶음 먹고싶었는데 1인분은 좀 눈치보이는 종류의 음식이라 아쉽다.
마지막 수업은 거의 종교 부흥회같았다. 이미지트레이닝(중간에 졸려서 하품하다 눈물흘림...)에 긍정의 힘을 믿으라면서 물은 답을 알고있다 드립에... ㅋㅋㅋㅋㅋㅋ물은 답을 알고있다 얘기할때 너무 웃겨서 힘들었다. 그렇게 얼레벌레 수업이 끝났다. 처음 타보는 KTX는 꽤 신기하고 편했다. 어쨌거나 집에 왔다! 면접까지는 3일이 남았고, 동생의 친구(회사원)을 만나 면접 얘기를 묻거나 면접 정장을 사러 다녀오는 등 자잘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날이 찾아왔다!
-면접은 굉장히 미적지근했다. 이젠 기도메타뿐이다. 내 운을. 내 대답을 믿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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