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 배 리뷰 -<배가 삭지 않도록>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이후 '배'는 한국인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자리잡은 상징이 되었다. 배는 진실이기도 했고, 사람들이 회피해온 책임이기도 했고, 희생당한 아이들 그 자체이기도 했고, 차가운 절망의 바닷속에서 끌어올려야만 할 희망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때로 옳았고, 때로 옳지 않은 뜻이 되어 스티커처럼 떼어졌다 또다시 붙었다. 배는 여전히 배였으나 배를 둘러싼 이야기, 그리고 상징성만은 거품처럼 불어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배에는 어떤 '진실'이 있는가? 무성한 정치적 음모론도, 정권에 대한 비난의 도구도 아닌 성긴 규제와 안전불감증이 엮어낸 참혹한 결과만이 진실이다. 소설 <누운 배>는 이 거대한 사건의 그림자 안으로 기꺼이 발을 들인다. 이야기의 얼개는 전혀 다르지만 배를 둘러싼 상징의 변화, 이해관계 속에서 썩어가는 배의 모습은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하다.
배가 쓰러졌다. 배는 왜 쓰러졌을까? '왜'는 그리 중요치 않다. 누구도 원인을 알고자 하지 않고, 책임을 지고자 하지 않는다. 처음 배는 단순히 보험사에게 최대한 많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배를 일으키기로 한 순간부터 회사의 희망이자 애물단지가 되었다. 배의 의미는 수시로 변화했고, 그럴수록 진실은 가라앉아만 갔다. 사실 모두 알았지만 모르는 체 했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둘 스스로 회사를 떠났다. 건져낸 배는 어떠한가? 완전히 썩어있었다. 갈 곳 없는 책임의 결과란 허망한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배의 진실은 텅 비어있다. 썩어버린 배는 회사 그 자체가 되어 사람들을 갉아먹었다. 문제가 드러난 후에도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난 문제 위로 쌓이는 문제만이 옛 문제를 감출 뿐,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누운 배는 사회소설의 형식을 띄고있지만, 동시에 기업소설이기도 하다. 저연차 사원 '문 기사'의 시선은 회사의 허위와 모순을 날카롭게 포 떠내어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빼곡한 전문용어와 상세한 묘사는 독자의 눈 앞에 그려질 듯 생생하게 중국 내 한국 조선소의 모습을 그려놓는다. 그곳에서 책임은 최대한 져선 안될 것이며, 모두의 문제는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니다. 아주 기초적인 자료조차 필요로 하기 전에는 제대로 구비되지 않으며, 높으신 분의 뜻만 있다면 무엇이든 단번에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돌아간다. 사람들은 혁신을 말하지만 그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일뿐이다. 업무와 성과를 원하는 이는 버티지 못하고, 줄을 잘 서서 안온하게 자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살아남아 자리를 지킨다. 그들이야말로 회사라는 배를 침몰하게 하는 물이다. 그 속에서 고작 3년차 사원의 자리는 늘 불안하다. 그는 숙이지 못하는 오 팀장을 연민하면서도 어리석다 생각한다. 결국 회사에 젖는 것만이 이 거대한 조직에서 살아남는 오직 단 한 가지 방법인양 느낀다. 그런 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신임 사장인 황 사장이다. 황 사장은 권력과 타협하지 않으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황 사장의 모습을 보며 문 기사는 진짜 회사가 무엇인지를 반추한다. 하지만 타협하지 않는 개인은 거대한 조직 앞에 꺾여나갈 뿐이다. 끝내 황 사장역시 관료주의의 굴레에 패배하고만다. 젖어버린 사람들 속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누운 배 그 자체가 되었다. 문제와 문제를 먼지처럼 뒤집어쓴 채 썩어가는 것 만이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다. 그대로 녹슬기에 미래는 너무나 길다. 그는 아무런 기약 없이 회사를 떠난다. 마치 예정되어있던 것만 같은 결론이 씁쓸하다.
회사를 선택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임금 수준, 둘째 비전,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동료. 문 기사의 판단 속 회사는 그 어느것도 갖추지 못했기에 퇴사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구나 그와 같은 이유로 퇴사를 꿈꾼다. 썩어가는 배 속에서 배 안의 부품이 되기 전에 물 위로 올라가기를 원한다. 이 소설을 읽은 모든 회사원들은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탄, 혹은 나라는 배는 가라앉은 채 썩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젊음을 돈으로 바꾸어가며 하루하루 늙어갈 뿐인 것은 아닌가? 회사 안에도, 회사 밖에도 그 어느곳에도 완벽한 미래는 없는데 그저 도피할 뿐은 아닐까? 질문에 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문제를 문제라 여길 수 있다면 결코 늦지 않았다.
배는 조선소에만, 차가운 바닷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침몰한 채 삭아가는 모든 문제다. 문제가 문제로 남지 않도록, 모든 배가 물 속에서 삭아가지 않도록 결코 눈을 돌려선 안된다. 우리 안의 배를 직시하고,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한 배는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p.s.
회사란 무척 남성적인 조직이다. 특히 중공업/운수업 등의 전통적인 남성성이 지배하던 업종은 더더욱. 작중 존재를 식별할 수 있는 여성 직원은 왕준매와 주 기사, 단 두명에 불과하며, 임원 급에는 단 한명도 없다. (작 중 주 기사는 입사 3년차가 되었지만 진급에서 누락되었으며, 본인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급이 누락된 것이 아닌지 분노한다.) 실제로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은 올해 첫 여성 등기임원을 발탁했다. 작가는 실제로 조선소에서 약 3년간 근무한 남성이다. 서술자의 서술을 전부 작가 개인의 생각으로 볼 수는 없는 법이지만 나이브한 남성성에대한 환상이 섞인 묘사는 옅은 안개처럼 불쾌하다.
"그때 조선소에 뱃사람이 많았다. 마음에 안 들면 술판을 뒤엎듯 용접기 가스통을 내던지던 남자들. 무식하고 단순하고 저돌적이지만 비열하지 않고 저의가 없는, 순박하되 편협하지 않고 의리를 알되 야합은 모르던 남자들, 그 남자들은 낙천적이지만 게으르지 않았다."
그들이 순수하고 의리를 아는 진정한 '남성'인가? 도대체 남성성이란 뭔지. 그들이 그 일을 했던 것은 그들이 순박하고 의리를 아는 사람이기때문만은 아니다. 단순히 그 일이 여성에게 개방되지 않았기때문이다. 남성적 세계관은 여성의 자리를 지우고 그 자리를 남성에 대한 나이브한 회상과 환상으로 채워넣는다. 소설의 남성성에 대한 불만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왜 개인의, 특히 남성의 일탈과 허무함은 성에대한 탐닉 끝에 느끼는 허무로 귀결되는가? 타성에 젖어버린 문 기사의 모습을 표현하는 수단이 여자를 사서 놀고, 끝내 허무감을 느끼는 모습인 것은 실제 그러한 모습이 현실에서 흔한 모습이라고 할 지언정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소설은 현실의 거울이라는 말로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기에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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