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에서 그냥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인데,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일하는 진취적인 사원이 되란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니까 뭐든지 도전하는 자세를 가지란다. 오픈월드 게임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는 게임이란다. 모든 것이 너의 선택이고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니까? 만 갈래로 찢어진 갈래길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든다. 만 개나 되는 길은 만가지 책임을 의미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아주 잘 안다. 뭐든지 골라보렴. 뭐든 다 잘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건 모두 네 선택이란다. 끝없는 자유가 있을 것처럼 말해놓고 자유 뒤에 따라올 고난의 길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주인'인 우리가 모두 해결해야 할 몫이라고만 말한다.

 대학교에 갈때까지만 해도 인생의 퀘스트는 꽤 단순했다. 초등학생이라면 중학교에 가시오. 중학생은 고등학교에 가시오. 고등학생은 대학교에 가시오. 물론 대학교부터는 조금 '자유도'가 높은 퀘스트긴 하지만, 어쨌든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고르면 비교적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 있었다. 문제는 대학교 이후의 삶이었다. 취업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고, 취업 이후는 더 막연했다. 회사에 들어갔다고 끝이 아니라 내 스스로 주체적으로 커리어를 개척해나가야 한단다.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만들어나가야 한다. 웃기지도 않는다. 근 20년을 시키는 것 하라고 등을 떠밀어놓고는 한 5년정도의 유예기간만 주면 모든 것을 알아서 잘하는 척척박사가 되리라는 기대는 최악이다. 유예시기를 거쳐 최악의 기대에 부응한 아이들은 알아서 잘 살고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든 얼레벌레 살며 '사장님이 미쳤어요' 현수막이 붙은 타이어 가게 사장처럼 살아간다. 조금 넋빠진 주인이 되는 셈이다.

 넋빠진 주인들도 주인이니까 책임은 져야 하지만, 넋이 빠진 만큼 대충 살고싶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넋이 빠져있다. 혹시 누가 나 대신 살아줬으면 좋겠다거나, 뭐 해야 좋을지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나? 그렇다면 당신도 넋빠진 주인이다. 제정신인 채로 진짜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건 정말이지 너무 힘들다. 대충 살지 말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정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니. 미켈란젤로가 아닌 사람에게 대리석을 갖다주고 사람을 만들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텐데, 세상은 우리 앞에 돌덩이 하나를 던져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힘들다 이거예요.

 이런 흐름으로 나는 사람들이 왜 피학을 통한 쾌락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쾌락조차 머리를 써가면서 얻어야 하다니 너무 힘들지 않은가? 노예를 즐겁게 해주려면 적당히 저질스럽고 쾌락을 줄 수 있는 말을 골라야 하고, 어떻게 해야 새롭게 저질스러울 수 있을지 매번 고민해야 한다. 내 인생의 주인 되기도 힘든데 쾌락의 주인님까지 해야 한다니 아주 귀찮은 일이다. 그들, 노예휴먼들은 현대인의 멘탈리티를 대변하는 인물들이었던것이다.(물론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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